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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미술 인문학] 네이키드(Naked)와 누드(Nude)

기사승인 2019.01.23  00: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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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 신현국

 유럽의 중세 성당을 방문하다보면 엄숙해야할 성당에 장식된 누드화를 볼 수 있다. 미사를 보는 신성한 곳에 이런 누드화를 전시해도 되는 것인지 때론 의문을 갖기도 한다. 누드화가 미술사에 나타난 시기는 그리스 시대다. 그리스 이전 이집트 미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누드화가 그리스 미술에 나타난 것은 그리스인들의 사상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인들이 인체에 대해 남다른 열의를 갖게 된 것은 “인체는 곧 우주의 원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체를 잘 가꾸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그들의 생각은 올림픽이라는 운동경기를 창시하게 된다. 그들은 생활 속에서 늘 아름답고 건강한 몸을 가꾸기 위해 노력해왔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시대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는 인간의 몸을 가장 완벽한 비례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같이 인간 몸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그리스‧로마시대를 넘어 중세로 이어지면서 예술적으로 형상화 된다.

라오콘상

그리스 미술에 등장하는 누드는 대부분 조각상을 통해 볼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만들어진 ‘원반 던지는 사람’으로 알려진 ‘디스코볼로스’는 8등신의 균형 잡힌 완벽한 남성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 헬레니즘 조각을 대표하는 ‘라오콘 상’역시 고통 받는 라오콘의 일그러진 표정과 대조적으로 매끈하고 완벽한 남성의 육체를 표현했다. 한편 중세 이콘화에 나타나는 누드는 아담과 이브의 외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중세의 엄격한 교리가 누드화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중세 말 사람들의 관심이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지면서 화가들에 의해 대담한 누두화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등 많은 누드화가 르네상스시대부터 그려진다. 성당에 장식된 누드화는 대부분 르네상스시기에 그려진 작품들인데 당시는 조각뿐만 아니라 회화에서 누드가 일반화 되었다. 이렇게 누드화가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누드의 성화를 외설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네, ‘올랭피아’

1870년 예술평론가 카미유 르모니에(A‧L‧Camille Lemonnier)는 누드가 예술이 되기 위한 조건에 대해 “성처녀로의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서 예술작품 속의 누드는 비인격화되어야하며, 특정 인물을 생각나게 해서는 안 된다. 예술에서는 현실의 미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애교점이나 엉덩이의 사마귀 같은 것은 없어도 된다. 예술작품에서의 누드는 아무것도 가리고 있지 않지만, 결국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결국, 성당 내부를 장식한 누드는 아무것도 부여주지 않는 알몸이기 때문에 성화를 통해 신성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르네상스 회화는 그리스 회화가 추구한 이상적 인간을 화폭에 담았다. 인간을 통해 신의 형상을 보여주기 위해 늘 인간은 8등신의 완벽한 육체로 묘사되었다. 비록 모델을 보고 스케치를 하지만 이상적 비례로 그려낸 것이다. 이렇게 인체를 완벽한 비례로 그려내는 아카데미적 전통은 19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9세기 중반 마네의 ‘올랭피아’가 사람들로 하여금 노여움을 샀던 이유는 고귀한 회화에 인간을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인상파의 탄생에 영향을 준 마네는 1863년 ‘풀밭위의 점심’이란 작품으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며 그의 존재를 알렸다. 정장의 신사와 함께 나체의 여인이 점심을 먹는 장면으로 현실의 노골적인 누드화를 낙선전에 전시했기 때문이다. 그 후 2년 뒤인 1865년 마네는 ‘올랭피아’를 전시하면서 또 다시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는다. 모델의 어색한 표정과 수치심 없는 노골적인 자세는 매춘부를 연상케 하는 외설적인 그림으로 평가되었다. 누드화는 늘 신격화된 인체를 묘사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던 시대에 현실의 여인을 진실 되게 표현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더욱이 그의 그림은 티치아노(Vecellio Tiziano)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비교되면서 천박한 그림으로 치부되었다.
사실 마네는 학생 시절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스케치하곤 했지만 그는 신격화된 비너스가 아닌 인간을 그린 것이다.

고야, '옷벗은 마하, 옷입은 마하'

얼마 전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표창원 의원의 전 박근혜 대통령 풍자 누드화도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그림이었다. 이 사건을 사람들이 저질이라 비난했던 이유도 그림 속 모델의 인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마네가 영감을 받은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그의 스승인 조르조네(Giorgione)의 ‘잠자는 비너스’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조르조네는 티치아노와 같은 베네치아 화파로 그는 최초의 풍경화 ‘폭풍’으로 이미 명성을 얻은 작가이다. ‘잠자는 비너스’를 완성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조르조네를 대신해 티치아노는 ‘잠자는 비너스’를 완성했다. 이후 우르비노 공작의 주문으로 그리게 된 그림에서 티치아노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조르조네의 비너스 대신 세속적인 배경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그린다.

‘레이디 고다이바’

여인의 누드 와상은 조르조네로부터 티치아노, 앵그르 그리고 마네의 ‘올랭피아’로 영감을 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앵그르는 마네와는 정 반대의 평가를 받은 화가다. 현실의 누드보다 오히려 비현실적인 육체가 문제가 되었다. 신고전주의 화가인 앵그르는 그리스미술에 보다 충실한 화가였기 때문에 보티첼리가 ‘비너스의 탄생’에서 표현한 과도한 어깨선과 긴팔처럼, 다소 길게 늘어트린 허리를 통해 이상적인 육체를 표현한 것이다. ‘올랭피아’처럼 현실의 육체를 표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수난을 당한 작품이 있다. 1796년 고야의 ‘옷 벗은 마하’는 엄격한 카톨릭 교리가 지배적인 스페인의 사회적 분위기 탓에 누드화라는 이유만으로 공개되지 못했다. 이후 고야는 ‘옷 입은 마하’라는 작품을 만들어 발표하였다. 1970년대 우리나라 유명 성냥회사에서도 ‘옷 벗은 마야’를 표지에 실었다가 풍기 물란 죄로 벌금을 물기도 했다. 이처럼 누드화는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서 외설로 평가 받기도 했다. 

누드화지만 고귀한 누드화로 알려진 그림이 있다. 1898년 존 콜리어(John Collier)의 작품 ‘레이디 고다이바’는 11세기 영국 코벤트리 지방 영주의 과도한 세금을 내리기 위해 부인인 고다이바가 알몸으로 말을 타고 영지를 일주하는 장면을 재현한 그림이다. 공중의 행복을 위해 창피함을 무릅쓰고 알몸으로 말을 탄 고다이바 부인의 누드화는 오히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며 이를 외설로 보는 사람은 없다.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은 부당한 관행에 맞서는 대담한 정치를 뜻하는 ‘고다이바즘’이라는 말을 남겼다. 쵸콜렛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면 누구나가 아는 벨기에의 ‘고디바(Godiva) 쵸콜렛’은 고다이바 부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한편 ‘레이디 고다이바’에 대한 이야기는 패션사진가들에게도 종종 재현되고 있는 소재이다.

에드워드 웨스턴, ‘누드’

19세기 들어 화가들은 고전주의적 전통에 반기를 들고 작가의 감정을 화폭에 담는다.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 사실주의로 이어지면서 회화에서 더 이상 신격화된 인체는 묘사되지 않는다. 1839년 사진이 발명되면서 대중은 이미지가 얼마나 현실과 닮아있는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사진이 발명된 지 얼마 안 되어 ‘포르노그라피’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 된 것은 대중들의 사실적 이미지에 대한 욕구를 잘 반영한다. 초기에는 회화의 밑그림을 위해 촬영된 누드사진이 일반적이었지만, 사진의 복제기술 발달로 포르노그라피는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누드사진을 보고 그린 회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 육체로 묘사되었지만 사진은 현실의 이미지를 그대로 담고 있었기 때문에 누드사진의 수요는 급증하게 되었다. 20세기 이전까지의 누드사진은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춘화 수준의 사진이 일반적이었다. 외젠느 뒤리의 사진 ‘오달리스크’에서 보여지 듯 19세기 누드사진은 매춘부를 모델로 회화를 모방한 사진들이었다. 1900년대에 들어 에드워드 웨스턴과 같은 작가들에 의해 누드사진은 예술성을 띄게 된다. 에드워드 웨스턴은 의식과 감각을 최대한 동원해 인체를 생동감 있는 조각 작품으로 표현함으로써 누드사진의 예술적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이다. 특히 1936년에 촬영된 티나 모도티(Tina Modotti)의 누드사진은 독특한 포즈와 구성으로 마치 살아있는 조각 작품을 보는 듯하다. 그는 누드사진의 예술적 가능성을 간파한 최초의 사진가이기도하다.

나영균 기자 siss4779@nate.com

<저작권자 © 한국사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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