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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생명을 불어넣는 인문학] 비어 있지만 소중한 유산, 선정릉

기사승인 2019.01.21  14: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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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희·윤상구|21세기북스

조선 왕릉은 거의 수도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도성으로부터 80리(지금 이수로 100리, 40킬로미터) 안에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예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왕릉도 있습니다. 바로 선정릉입니다. 2호선 선릉역과 분당선 선정릉역은 자주 지나다녀도 그곳에 왕릉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곳에는 세계문화유산 조선 왕릉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 왕릉에는 값비싼 부장품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했고 유교는 현실 세계를 중시하는 종교이므로 저승에서 금붙이가 소용될 것이라 믿지 않았던 것이지요. 덕분에 조선 왕릉은 도굴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왕조의 왕릉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고 그 점이 조선 왕릉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도굴을 당하지 않아 봉분 안에는 왕이나 왕비의 유해가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조선 왕릉 중 유해가 없는 능이 몇 있습니다. 을미사변 때 시신이 훼손되어 옷가지로 장사지냈던 명성황후(고종의 비)의 경우는 당연히 유해가 없겠지요. 그리고 여기 선정릉에도 유해가 없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도굴되고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유해를 끝내 찾지 못하자 새로 관을 짜서 부장품으로 넣었던 옷을 태운 재를 담아 다시 안장했다고 합니다.

선정릉 중 선릉은 조선의 제9대 성종과 제2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입니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와 훗날 소혜왕후가 되는 세자빈 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자을산군으로 불린 성종은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되어 아버지 의경세자를 여의었습니다. 할아버지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이 즉위하였지만 예종은 불과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종이 세상을 떠난 날 세조비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을 전격적으로 왕위에 올렸습니다.

성종은 원로 대신이 왕의 업무에 관여했던 원상제도를 폐지하고 이들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사림 세력을 끌어들였습니다.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 김종직이었는데 3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립한 이들은 요순의 태평성대를 이상으로 삼는 도학 정치를 표방하였습니다. 사림파는 유자광, 이극돈 등 훈구파를 불의와 타협하여 권세를 얻은 소인배라며 멸시했습니다. 훈구파는 사림파를 잘난 체하는 야심가라며 맞대응하여 이 두 세력은 서로 심하게 반목을 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성종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을 이용하여 조정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습니다.

선정릉의 정릉. 학문을 좋아한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의 능이다.

성종 학문을 좋아하는 왕이었습니다.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홍문관과 독서당을 만들었으며, 성균관과 각 도의 향교에 토지와 서적을 하사하여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습니다. 또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집에서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게 하는 호당 제도를 통해 학자들이 문화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 <오례의> <삼국사절요> <악학궤범> 등 조선 전기의 문화를 집대성한 서적들이 속속 편찬 간행되었습니다.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책자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하라는 명을 내려, 유교적 도덕관을 백성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성종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역시 <경국대전>의 완성입니다. <경국대전>은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의 6전으로 구성된, 조선의 국가 조직과 정치, 사회, 경제 활동에 대한 기본 법전입니다. 세조 때부터 시작된 <경국대전>의 집대성 작업은 20여 년 간 이어진 후 1470년에 완성되었고, 이후 조선 왕조 500년의 기본 법전으로서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로써 조선의 정치 제도가 자리를 잡았고 조선은 유교적인 법치 국가로서 그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성종은 이렇게 세종 때 시작된 문물 제도의 정비 사업을 완결지었습니다. 그런 점을 인정받아 ‘이룰 성(成)’자가 들어가는 묘호를 받은 것입니다.

성종 시대는 학문이 발달하고 유교 문화가 꽃을 피웠던 태평성대였습니다. 그러나 성종의 치적에도 오점은 있었습니다. 바로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문제였습니다. 성종은 자을산군 시절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와 가례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공혜왕후가 별세하자 후궁이었던 제헌왕후가 계비가 되었습니다. 그 제헌왕후가 바로 폐비 윤씨입니다. 성종은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자신이 죽은 후 100년 동안 폐비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지요. 폐비의 죽음은 감추어지기는커녕 정치적 문제로 확대되어 훗날 연산군의 폭정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의 문화를 꽃피우고 태평성대를 이뤘던 성종은 여자 문제로 커다란 불씨를 남긴 채 1494년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릉의 덩치 큰 무석인의 자애로운 표정은 성종 때의 태평함을 말해주는 듯하다.

두 개의 언덕으로 이뤄진 선릉의 또 다른 언덕에 묻힌 정현왕후는 후궁으로 간택되어 대궐에 들어왔다가 제헌왕후가 폐위되자 이듬해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정현왕후는 훗날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를 낳았지만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그녀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습니다.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묘지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고는, 친어머니로 알고 있는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를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정도였습니다. 이 질문에 승지들이 폐비 윤씨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연산군은 비로소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비 윤씨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현왕후의 능이 성종의 능으로부터 유난히 떨어져 있어 완전히 다른 능으로 보이지만 선릉이라는 같은 능호를 쓰는 부부의 능입니다. 성종의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세워져 있고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도심 한가운데 있어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탄 탓인지 선릉의 석물은 유난히 심하게 닳아 보이지만 덩치가 큰 무석인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성종 때의 태평함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선릉 능상에 올라가 보면 어느 쪽에도 배경에 고층 빌딩 안 보이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배경이 부자연스럽지 않고 오히려 왕릉을 푸근하게 감싸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선정릉 중 정릉은 제11대 왕 중종의 능입니다.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아들,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났습니다. 왕이 되기 전 진성대군이었던 중종은 폭군인 형 연산군의 치하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 누구라도 역모를 하다가 발각되어 추대하려는 인물로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기만 하면 그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정현왕후의 능. 성종의 능으로부터 떨어져 있어 완전히 다른 능으로 보이지만 선릉이라는 같은 능호를 쓰는 부부 능이다

연산군이 민생과 국정은 뒷전으로 미루고 광태만 부리자 연산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움직임이 전국에서 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연산군은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일으킨 반정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이로써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이 비로소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중종에게는 원비 단경왕후와 제1계비 장경왕후, 제2계비 문정왕후, 이렇게 세 명의 왕비가 있었습니다. 단경왕후는 연산군의 처남으로서 반정에 반대한 신수근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조강지처였지만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비가 되었습니다.

중종의 후궁들 중 장경왕후는 정실의 소생이었던 덕에 왕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훗날 인종이 되는 아들을 낳았지만 산후병으로 출산 6일 만에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3년 후 30세가 된 중종은 간택령을 내려 왕비를 뽑아들였습니다. 그때 간택된 왕비가 바로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입니다.

중종은 1544년 자신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다음날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 인종은 고양시의 현재 서삼릉 능역 내에 있는 장경왕후의 희릉 오른쪽 언덕에 중종의 능을 새로 조영하고, 능호를 정릉이라 붙였습니다.

그런데 명종 때 문정왕후가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 끝에 서삼릉 내 능지가 명당이 아니라며 다른 자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현재 선정릉의 정릉 자리가 풍수상 길지라 하여 왕릉만 천장을 했습니다. 표면상으로는 길지를 찾아 옮긴 것이라고 하지만 여기에는 문정왕후가 죽어서라도 자신이 중종 곁에 묻혀 남편을 독점하겠다는 속셈이 들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새 능 자리는 명당이 아니었습니다. 지대가 낮아 여름철에 홍수라도 나면 한강 물이 재실까지 차올라오는 흉당이었습니다. 그래도 문정왕후는 자신도 정릉에 묻혀야 했기 때문에 매년 능에 흙을 돋우는 데 많은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이런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는 중종 곁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해 홍수가 나서 정릉에 장사를 지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단경왕후는 장흥의 온릉에, 장경왕후는 서삼릉 내 희릉에, 문정왕후는 서울 공릉동의 태릉에 각각 묻히고 왕비를 셋이나 두었던 중종은 정릉에 홀로 잠들어 있습니다. 기껏 명당 찾아 옮겨온 자리이지만 정릉이 명당이 아님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천장된 후 임진왜란 때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장경왕후 곁에 있었더라면 겪지 않았을 수난이지요.

선정릉 중 중종의 정릉. 중종은 왕비를 셋이나 두었지만 정릉에 홀로 잠들어 있다.

정릉은 성종의 선릉과 거의 닮은 꼴로 만들어졌습니다.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을 세웠고 그 주변에 열두 칸의 난간석을 둘렀습니다. 별로 높지 않은 능상에 혼유석, 장명등석이 있고 망주석, 문석인, 무석인이 각 한 쌍씩, 마석, 양석, 호석이 두 쌍씩 설치되어 있습니다. 높이가 3m가 넘는 정릉의 무석인은 눈은 휘둥그래하지만 둥그스름한 얼굴 윤곽에 후덕한 느낌을 주는 인상을 하고 있습니다.

중종은 재위 38년 동안 정비 셋을 포함한 열 명의 아내 사이에서 9남 11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 중 두 명인 적자가 모두 왕위에 올랐고 서자 한 명은 왕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얼핏 보면 중종은 무척 다복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중종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왕도 흔치 않습니다. 우선 형 연산군 재위 시절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죽이며 살았을 것이고, 친할머니와 부왕의 후궁들, 이복동생들이 연산군에 의해 참살당하는 패륜적 사건도 목격해야 했습니다. 왕이 된지 7일 만에는 조강지처와 생이별하고 다시 얻은 아내와는 사별해야 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또 조선의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한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가 모두 중종의 생존 기간에 일어났으니 그는 일생을 피비린내 속에서 살았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바로 곁에 부모의 능이 있기에 중종은 아늑하고 편안한 곳에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정릉은 풍요 속의 빈곤을 나타내는 외로운 능이지요. 중종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죽어서도 계속되었습니다. 함께 묻히기 원했던 여인 곁에서 강제로 떠나면서, 조작된 명당에 자리하면서, 두고두고 물난리를 겪으면서, 전란 중에 큰 훼손을 당하면서 중종의 영혼이 얼마나 뒤숭숭한 잠자리에 있었을지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뒤늦게라도 중종의 영혼이 편안하고 안락한 잠을 이루고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 황인희(역사칼럼니스트, 인문여행작가)

신현국 기자 nsset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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