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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생명을 불어넣는 인문학]

기사승인 2018.09.04  0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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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면 그냥 지나치는 명릉(明陵)의 사연

황인희·윤상구|21세기북스

“아는 만큼 보인다.”

알면 그만큼 더 보이고 더 보이면 더 재미있습니다. 또 사진 찍는 분들에게는 더 보이면 찍을 거리가 더 많아집니다. 어찌 보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여기서 생기는 걸지도 모릅니다. 같은 장소에 가도 아마추어는 뭘 찍어야 할지 몰라 헤매다가 빈손으로 돌아오지만 프로는 뭔가 멋진 사진을 건져냅니다. 그 차이의 시작은 바로 ‘아느냐 모르느냐’이겠지요.

서오릉 명릉의 사연을 들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선 명릉의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명릉은 조선 제19대 숙종(肅宗 : 1661〜1720)과 그의 제1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 1661〜1680),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 1687〜1757)의 능입니다.

숙종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조선시대 역대 왕 계승 때마다 왕실과 대신들이 적장자 계승을 무척이나 간절히 주장하였지만 실제로 적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스물일곱 명 왕 중 1/3밖에 안되는 아홉 명(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헌종, 순종)뿐이었습니다. 그 중에 숙종이 당당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단 왕위 계승 때 여러 잡음에 의한 혼란은 피한 셈이지요. 7세에 별 무리없이 세자에 책봉되었고 14세 되던 해 부왕 현종을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바로 당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선왕인 현종 때부터 시작된 예송 논쟁이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난 것이지요. 효종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뜨자 그 시어머니인 인조비 장렬왕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로 떠들썩했던 것이 현종 때 있었던 제2차 예송 논쟁이었습니다. 현종이 9개월이 아니라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남인 쪽의 의견을 들어주어 이 일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종이 죽은 후에도 인선왕후의 상이 끝나지 않으니 서인들이 다시 이 문제를 들고 일어선 것입니다.

명릉 능침은 우리 보기에 왼쪽부터 인원왕후, 숙종, 인현왕후의 순으로 조성되어 있다.

송시열을 앞장세운 서인이 다시 복상 문제를 들고 나오자 전국은 다시 예송 논쟁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숙종은 주저함 없이 부왕의 의견을 따라 남인의 1년 기년설을 지지하며 시비를 건 송시열을 유배시켜버렸습니다. 이로서 정국은 남인의 주도로 돌아가게 되었지요.

그런데 숙종은 남인이 득세하도록 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모후 명성왕후의 사촌 동생인 김석주를 기용해 남인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지요. 서인 세력의 발언권이 완전히 조정에서 사라지게 되었을 무렵 숙종은 김석주와 나머지 서인 세력의 힘을 모아 계략을 짜서 남인들을 모두 몰아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신환국이지요.

다시 정국은 서인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럴 즈음 숙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 장옥정이 왕자를 낳았습니다. 숙종은 한창 장옥정이 빠져 있을 때라 그 소생을 바로 원자로 정하려 하였습니다. 서인 측은 중전 인현왕후가 아직 젊으니 적자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며 원자 확정을 반대하였지요. 그런데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옥정의 소생 균을 원자로 정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소의였던 장옥정을 희빈으로 승격시켰습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노론계 대신들은 원자 확정을 그렇게 급히 서둘지 말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숙종은 “왕자가 이미 세워져서 군신의 분수에 맞는 도리가 완전히 정해졌는데 송시열이 여전히 불만의 뜻을 가지고 있다”라며 불쾌함을 드러냈습니다. 이때 수많은 노론계 대신들이 유배를 가게 되었고 원로 대신 송시열은 사약을 받았습니다.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중전이 되었으며 원자 균이 세자로 책봉된 것도 이때입니다. 이런 일들로 서인이 정국에서 물러나고 다시 남인이 득세를 하였는데 이 일을 기사환국이라 합니다.

명릉의 문석인과 무석인, 마석 등 석물은 이전의 다른 능에 비해 아주 작다.

물론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사환국으로부터 5년 후 서인 세력이 폐비 복위 운동을 펴다가 민암 등 남인들에게 붙들려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남인들은 이 사건으로 서인 세력을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했지요. 그런데 숙종은 오히려 민암을 비롯한 남인들을 쫓아내버렸습니다. 그때 숙종은 중전이었던 장옥정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사건을 계기로 남인들이 밀려났습니다. 숙종은 서인의 노론계 송시열 등의 명예를 회복해주고 소론계를 등용하여 정국의 변화를 꾀했는데 이것이 ‘갑술환국’입니다. 이때 장옥정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폐비였던 인현왕후는 대궐로 돌아오게 되었지요.

희빈으로 강등된 장옥정은 다시 중전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의 오라비 장희재와 함께 별의별 궁리를 다 하다 번번이 발각되어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세자의 생모라는 이유로 겨우 그 위기를 모면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인현왕후가 죽은 후 장희빈의 거처인 취선당 부근에서 신당이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죽게 하려고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숙종이 크게 화를 내며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지요.

숙종은 현종 때 예송 논쟁으로 손상을 입은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기 위해 신하들을 쥐고 흔들었습니다. 왕이 정계를 대 개편할 수 있는 권한인 이른바 용사출척권을 통해 세 번에 걸쳐 정국을 뒤엎었던 것입니다. 어질고 착한 인현왕후가 포악하고 욕심 많은 장희빈에 의해 쫓겨났다가 다시 왕비 자리를 되찾는 사건, 그리고 장희빈 일당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이 권선징악적 사건들도 신하 길들이기를 위해 숙종이 고의적으로 만들어낸 환국 정치의 한 장면이었을 뿐이라지요. 숙종은 이렇게 정국을 움직이는 데 아내들마저 희생시킨, 몰인정하리만치 강한 왕이었습니다.

숙종은 재위 기간 강력한 왕권으로 정말 많은 일을 처리하여,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사회 전반의 문제를 거의 다 복구했다 할 정도로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우선 화폐를 본격적으로 만들어내는 등 조선 후기 상업 발달과 경제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또 국방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지요. 국경 지역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쌓았고 서울 방어를 위해 도성 수리 공사를 하였습니다. 군사 제도도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와 협상을 통해 압록강 연변에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지었습니다.

이 외에도 숙종은 노산군을 복위시켜 단종이라는 묘호를 정해 종묘에 모셨고 성삼문 등 사육신을 복관시키는 등 과거사 정리를 많이 한 왕입니다.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실권을 쥐고 있던 바쿠후 정권을 상대로 왜인들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아오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정열적으로 왕권의 칼을 휘두르며 수많은 치적을 남긴 숙종은 1720년 46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6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홉 명의 아내에게서 여덟 명의 자녀를 얻었고 그 중 두 명(경종, 영조)은 왕위에 오르기도 하였지요. 이들 삼부자가 통치한 기간이 통틀어 102년으로, 조선 왕조 500년(1392〜1910) 중 1/5의 기간을 이들 부자가 통치한 셈입니다.

인현왕후가 세상을 뜨자 숙종은 대대적으로 능을 꾸몄고 그 곁에 자신이 묻힐 자리도 마련하였다.

숙종과 함께 나란히 묻혀 있는 사람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현왕후입니다. 인현왕후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서 1681년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습니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모함으로 폐위되어 대궐에서 쫓겨났습니다. 인현왕후가 쫓겨난 후 장희빈은 중전이 되었고 오라비 장희재를 비롯하여 이제껏 그를 후원해주었던 주변의 모든 인물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릴수록 더욱 인현왕후를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갑술환국 때 인현왕후는 복위되어 대궐로 돌아와 7년을 살았지만 자식을 얻지 못한 채로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현왕후가 세상을 뜨자 숙종은 인현왕후를 내쳤던 것이 후회되었는지 대대적으로 능을 꾸몄고 인현왕후가 묻힌 오른쪽에 자신이 묻힐 자리도 마련해두었습니다. 이렇게 숙종과 인현왕후는 한 언덕에 나란히 묻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능이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는 언덕 왼쪽에 마치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을 어깨너머로 건너다보는 듯이 만들어진 능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숙종의 제2계비인 인원왕후의 능입니다. 16세의 인원왕후는 41세의 숙종과 가례를 올렸습니다. 인원왕후는 숙종이 세상을 뜬 후 34세로 대비가 되었습니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 인원왕후는 궁중의 가장 큰 어른으로서 언문 교지를 내려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도록 하였습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세제 연잉군이 바로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입니다. 이렇게 영조는 인원왕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대왕대비가 된 인원왕후는 1757년 7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명릉에 들어서면 우리가 보기에 왼쪽부터 인원왕후, 숙종, 인현왕후의 순으로 능침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조성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왼편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져 얼핏 보면 동원이강릉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명릉은 일반적인 동원이강릉의 원칙을 무시한 능입니다. 예법대로라면 혼령의 입장에서 우상좌하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 왼쪽부터 숙종,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순으로 능이 조성되었어야 옳지요. 그런데 서열이 가장 낮은 인원왕후 능이 가장 상석에 있다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원래 인원왕후는 명릉에서 400보 떨어진 곳에 별도의 능 자리를 정해놓았습니다. 1757년 며느리인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 국장이 진행되고 그의 능인 홍릉 산역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홍릉은 영조가 자신의 신후지지로 만들라 명했기 때문에 정성왕후의 능이라기보다 영조의 능으로 조성되느라 대대적인 공사를 벌이게 된 것이지요.

바로 그 무렵 인원왕후가 별세했습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초상을 함께 치러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대비이고 며느리는 왕비였습니다. 또 현재 왕이 자신이 묻힐 자리를 왕비 곁에 만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능원을 조성하려면 숲의 나무를 잘라내고 정자각도 새로 짓고 각종 석물도 마련해야 하는데 여기 엄청난 나랏돈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꺼번에 대 역사를 두 군데서 벌이기에는 국고 손실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지요. 대비였던 인원왕후는 우선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명릉의 인원왕후 능은 정자각도, 참도도, 능호조차도 없는 미완성 능이다.

엄밀히 따지면 인원왕후의 능은 명릉의 동원이강 형식의 능이 아니라 명릉 가까이 조성된 별도의 능입니다. 단, 앞의 이유로 정자각도, 참도도, 능호조차도 별도로 갖지 못하고 아직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능인 셈입니다. 계모이지만 목숨을 살려주고 왕위에 무사히 오를 수 있도록 전적으로 후원해준 사람인데 제대로, 법도대로 장례를 치러주지 않은 것 같아서 영조의 처사가 조금은 못마땅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국고 손실을 줄여야 한다는 커다란 명분은 무시할 수가 없었겠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인원왕후는 자신이 미리 정해놓은 자리에 안장되지 못하고, 격식에도 맞지 않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명릉 한쪽에 잠들어 있습니다.

숙종은 자신의 능을 간소하게 할 것을 명했습니다. 능역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 치수도 실물 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제도를 새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명릉의 쌍릉은 능침도 작고 문석인과 무석인, 마석 등 모든 석물이 이전의 다른 능에 비해 아주 작습니다. 장명등도 옥개석이 팔각에서 사각으로 바뀌었고 능침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는데, 이것이 이후 조선 능제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신현국 기자 nsset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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