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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생명을 불어넣는 인문학]

기사승인 2018.05.26  16: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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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움 뒤에 숨은 부끄러움 – 동구릉의 숭릉

황인희·윤상구|21세기북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의 ‘꽃’ 중에서

 

지난 호에도 이 시를 소개드렸습니다. 아니 이 시는 연재가 끝날 때까지 제 글의 가장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진 찍기를 사랑하고 열심히 촬영하시는 분들께 꼭 소개하고 싶은 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사진이 생명을 얻고 그 가치를 발하려면 최소한 제목이라도 있어야 하고 거기에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는 얘기는 이 연재의 핵심이니 저는 몇 번이고 강조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호에도 사진에 붙이는 이름과 사연으로 활용하기 가장 좋은 인문학적 정보, 그 중에서도 역사 이야기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조선 왕릉을 주로 소개하는 이유는 제가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지만 그곳에는 의외로 사진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많기 때문입니다.

구리시의 동구릉, 아홉 개의 능이 있어서 붙은 이름인데 그 중 가장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숭릉 가는 길이 보입니다. 숭릉은 불과 2〜3년 전까지 비공개릉이었습니다. 그동안 숭릉을 공개하지 않았던 이유는, 숭릉 입구 연못에 사는 천연기념물 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구릉 관리사무소의 허가를 얻어 숭릉 촬영을 하러 들어갈 때면 하얗고 날개가 커다란 새들이 푸드덕 날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해진 지금은 그 새들의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숭릉의 정자각은 중국풍의 팔작지붕과 익랑이 있어 더 크고 화려해 보인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 한참을 들어가면 툭 트인 공간에 이제까지의 왕릉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식의 정자각이 나타납니다. 다른 능의 정자각은 우리 고유의 지붕 양식인 맞배지붕인데 숭릉의 정자각에는 팔작지붕을 얹었고, 정면 세 칸의 양식이 보통인데 거기에 양쪽 날개 같은 익랑이 더 붙어 규모도 커졌습니다. 왜 유독 이 숭릉만 이렇게 생겼을까요? 여기에 얽힌 당연한 역사 이야기가 있겠지요? 숭릉 사진을 찍으러 가서 “와,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능은 왠지 아름답네? 그냥 느닷없이 아름답게 지었나보다”라고 하며 셔터만 누르고 오면 스토리가 만들어질 수 없지요. 이제부터 숭릉에 얽힌 사연을 알아봅시다.

숭릉은 한 눈에도 건물이 화려하고 웅장해 보입니다. 하지만 팔작지붕과 익랑은 중국의 양식입니다. 이 숭릉은 조선 제18대 임금 현종(顯宗 : 1641~1674)과 명성왕후(明聖王后 : 1642~1683) 김씨의 능입니다. 현종의 아버지 효종이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돌아와 왕위에 오른 후 복수의 칼을 갈며 북벌 정책을 취했던 왕인 것을 생각하면 숭릉의 느닷없는 중국풍 상설은 참으로 어처구니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국은 당시 중국에 실존하던 청나라가 아니라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말합니다. 그때 조선은 오랑캐 청나라에 대한 반발로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풍에 더욱 심취했던 것이지요.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조선은 한동안 명나라가 다시 일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지고 명의 재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조선은 한나라 - 송나라 - 명나라로 전승되는 중화 문화의 흐름이 조선으로 이어진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의 문화를 그대로 따르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던 것입니다. 현종 대에 일어난 두 차례의 예송 논쟁의 배경을 ‘우리는 오랑캐와 달리 예법을 중시하는 민족이다’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숭릉의 제향은 매년 음력 8월 18일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열린다.

숭릉은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아들로, 효종이 봉림대군으로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 역대 왕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서 출생한 왕이지요. 효종이 세자로 책봉되는 동시에 현종도 세손에 책봉되었고, 그 해 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세자가 되었습니다.

현종 때는 밖으로부터의 침략이 없던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19세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두만강 일대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냈지만, 효종 때부터 비밀리에 추진해오던 북벌 정책을 중단했습니다. 더 이상 북벌 정책이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을 한 것이지요. 대신 훈련별대를 창설하여 군비 증강에 힘쓰기도 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서적 간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동철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하였고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해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였습니다. 같은 성씨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친족끼리 같은 부서에 있거나 시험관을 맡는 것을 금지시키는 상피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제주도에 표류해왔다가 억류되었던 네덜란드 선원 여덟 명이 탈출하여 14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하멜이 쓴 표류기 중 <조선국기>가 발간되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당시 조선의 객관적인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조선국기>에 의하면, 그 당시 국왕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고, 조정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대신들은 왕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할 수 없지만 언행으로 보좌할 수 있다고 했고, 비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80세까지도 신하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답니다.

현종 때 이야기를 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예송 논쟁입니다. 현종은 재위 15년 동안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예송 논쟁 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예송 논쟁은 현종이 즉위하자마자 일어났습니다. 효종의 장례를 치르며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얼마동안 상복을 입느냐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처음에는 학문적인 의견 차이였는데 나중에는 서인과 남인의 정쟁으로 발전해버렸습니다.

왕릉과 왕비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이어지는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효종은 자의대비에게는 둘째아들입니다. 하지만 왕이었기 때문에 여느 둘째아들보다는 더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였지요. 또 이미 자의대비가 장남의 예로 소현세자의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일이 아주 복잡해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송시열 등 서인들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기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남인의 허목 등은 효종이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남이나 다름없고 그래서 자의대비가 3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문제로 왕실뿐만 아니라 전국이 떠들썩해졌습니다. 이때 현종은 기년상으로 확정하며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제1차 예송 논쟁입니다. 제1차 예송 논쟁이 마무리 지어진 것은 현종 7년입니다. 효종이 별세한 후 7년이나 지났는데 그때까지 상복 입는 문제로 왈가왈부하고 있었으니 예송 논쟁이란 정말 의미 없는 공론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효종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예송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서인들은 인선왕후가 자의대비의 둘째며느리임을 강조하며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대공설을 주장하였습니다. 남인들은 둘째며느리이지만 왕비였기 때문에 1년을 지켜야 한다는 기년설을 내세웠습니다. 이것이 제2차 예송 논쟁입니다.

현종은 이번에는 남인의 손을 들어 기년설을 받아들였습니다. 제1차 논쟁 때는 현종의 왕권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때로서 당시 막강한 세력을 발휘하던 송시열의 말을 들어준 것이지요. 하지만 2차 논쟁 때는 자신의 아버지가 차남임을 강조하여 정통성에 흠을 만드는 서인들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효종은 제1차 논쟁 때의 예론도 모두 수정하도록 했습니다. 이로써 송시열 등은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고 서인들은 실각했습니다. 현종은 재위 기간을 거의 예송 논쟁에 휩쓸려 살다가 1674년 34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명성왕후는 돈령부영사 김우명의 딸로 태어나 11세 때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으며, 현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고종의 부인도 명성왕후였지만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명성황후로 추존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역사에서 명성왕후는 현종의 왕비뿐이지요. 명성왕후는 조선의 왕비 중 세자빈, 왕비, 대비 이 세 자리에 다 앉아본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만큼 나라는 태평하고 남편 왕의 지위가 탄탄했다는 얘기입니다.

현종이 별세한 후 왕위에 오른 숙종은 아직 미성년자였지만 명성왕후는 수렴청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숙종이 총명하기도 했지만 명성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우명이 서인이었기 때문에 남인이 득세한 상황에서 수렴청정을 하겠다고 나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홍수(紅袖 : 궁녀)의 변’이라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남인과 가까이 지내자 이에 불안해진 김우명은 세 왕손이 궁녀들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을 심문하다보니 그들은 죄가 없고, 오히려 김우명을 무고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명성왕후가 휘장 뒤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일로 남인들은 대비에 대한 비난의 상소를 수없이 올렸습니다. 수렴청정을 하지 않는 대비가 정청에 나타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숙종은 대비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왕손들과 궁녀들을 나눠서 귀양 보내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몸통이 통통한 양석은 태평성대를 이뤘던 현종 대의 인심을 말해주는 것 같다.

이 후로도 남인들은 명성왕후가 숙종의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경계했고, 서인의 김수항이 그녀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자 김수항을 탄핵하여 귀양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홍수의 변으로 망신을 당한 김우명은 얼마 안 있어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명성왕후는 1683년 병석에 누운 숙종의 쾌유를 비는 치성굿을 드리다가 병을 얻어 4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숭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연못은 방지원도(方池圓島)입니다. 방지원도는 네모난 연못 한 가운데 둥근 섬을 만든 인공 연못으로서 조선 시대 정원 문화의 특징적 요소입니다. 성리학의 우주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에 따라 하늘과 땅의 조화를 나타낸 것이며, 음양설에서 둥근 것은 ‘양’을, 모난 것은 ‘음’을 상징하는데 이 둘의 조화를 나타낸 것이기도 합니다.

숭릉은, 정면에서 볼 때 ‘정말 당당하고 번듯하다’는 느낌을 주는, 잘 정돈된 능입니다. 왕릉과 왕비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이어지는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곡장 안에는 양석과 호석 각 두 쌍씩과 망주석 한 쌍이 있고, 장명등석, 각 한 쌍씩의 문무석인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장명등석과 망주석의 기단에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무석인의 갑옷의 조각도 무척 섬세하고 정교합니다. 양석의 주둥이는 앞으로 튀어나와 있고 몸통이 돼지와 같이 통통한 것도 인상적입니다. 예송 논쟁을 제외하고는 태평성대를 이뤘던 현종 대의 인심을 숭릉의 석물들이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이 흔한 말이 스토리가 있는 사진을 찍는 데도 적용됩니다. 아는 만큼 찍을 거리가 많아집니다. 이 숭릉을 아름답게 볼 것인가 부끄럽게 볼 것인가에 따라 여러분의 사진에 서로 다른 개성이 담기게 될 것입니다. - 글 : 황인희(역사칼럼니스트 ‧ 인문여행작가) / 사진 : 윤상구(사진작가)

신현국 기자 nssetter@naver.com

<저작권자 © 한국사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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