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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코코 미술과 프랑스 혁명

기사승인 2017.10.12  19:2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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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미술 이야기]

와토, '시테르섬의 순례'

 18세기 들어 프랑스는 태양 왕 루이14세가 사망하자 귀족들은 보다 자유로워 졌으며 그들은 궁전 밖에 별도의 별실을 두고 때때로 사교를 즐겼다. 그 사교장소를 살롱(Salon)이라 부르며 그곳엔 유명 화가의 회화작품이 전시되었고 고가에 팔리기도 하였다. 미술에 있어서 살롱의 역할이 점점 커지면서 살롱은 예술품의 거래장소가 되었고 많은 미술가들은 살롱에 작품이 걸리는 것을 최고의 영애로 생각하였다. 

결국 국가에서 살롱 전을 주관하게 되었고 심사를 통해 공모전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전시를 하게 되었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 내에 살롱 전시장이 설치되어 정기적으로 미술품 전시가 이루어졌다. 귀족들의 시대인 18세기는 장식예술을 뜻하는 로코코미술의 시대로 귀족적, 여성적 성격의 미술성향이 나타난다.

로코코라는 말은 조개무늬 장식을 뜻하는 것으로 루이 14세 사후 프랑스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유희적인 성격의 장식예술을 뜻한다. 이러한 이유로 로코코 미술은 다소 퇴폐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불리기도 한다. 왕과 귀족들의 사치스러움을 보여주는 대표적 상징물이기도한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양식은 바로크풍이지만, 내부 장식은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되어있다.

프라고나르, '그네'

대표적인 로코코 미술로는 풍속화가인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가 당시 귀족들의 향락적 생활을 그린 ‘그네’로, 미명의 남작이 주문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는데 숲속의 은밀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남녀 간의 밀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한편 장 앙투안 와토(Jean-Antoine Watteau)의 ‘키테라 섬의 순례’는 비너스 신전이 모셔진 사랑의 성지인 키테라섬을 청춘남녀들이 순례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대체로 로코코 미술은 바로크 미술에서의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를 피하고 밝고 부드러운 화면구성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애로티시즘을 담고 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그동안의 향락적 미술 사조인 로코코풍은 사라지고 다시 르네상스 미술로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신고전주의는 혁명 후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술사조로 혁명의 이상을 담은 회화작품들이 등장한다.

나폴레옹의 궁정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는 대표적인 신고전주의 화가이다. 그는 혁명가이면서 화가로서 혁명의 이상을 회화에 담고자 하였다. 신고전주의는 그리스미술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들은 그리스미술의 조각을 통해 그들의 미적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리스미술의 근본은 자연의 모방이며 그들이 말하는 자연이란 다름 아닌 인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인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이상적인 인체를 담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인체를 소중히 생각했으며 늘 아름다움을 간직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의 회화나 조각상은 인체를 묘사하되 이상적인 신체의 조합을 통한 완벽한 인간상이 묘사되었다. 여신을 전라로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인간 이상의 완벽함으로 인해 우리는 에로티시즘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사상은 플라톤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현상계의 인간들은 플라톤의 동굴을 나와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그리스 미술에 영향을 주었으며 19세기 신고전주의 화가들이 새롭게 취함으로서 재탄생하게 된다. 신고전주의 화가들은 바로크 화가들과 다르게 색보다 형태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바로크의 역동성 보다는 그리스 미술의 안정적 구도를 선호하였다.

다비드, '마라의 죽음'

다비드의 유명한 그림 ‘알프스를 오르는 나폴레옹’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볼품없는 조랑말을 타고 오르는 키 작은 나폴레옹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이 그림은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통해 나폴레옹의 위대함을 표현한 것이다. 한편 다비드는 동료이자 자코벵파의 수장인 ‘마라의 죽음’을 통해 혁명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했다. 마라가 욕실에서 독살 당하자 그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묘사하고 그의 희생이 성스러운 죽음임을 그림을 통해 알리고자 하였다.

한편 코벵파와 지롱드파의 지루한 대결로 프랑스의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자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라는 그림을 통해 정치적 상활을 표현하였다. 로마 초창기 로마인과 사비니족과의 중재를 위해 나선 여인들의 심정을 현재 프랑스인들의 마음으로 환유한 작품이다. 다비드는 회화에 현실을 반영하고 회화를 통해 현실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화가였다.

다비드, '사비니 여인의 중재'

다비드와 함께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앵그르는 나폴레옹의 누이동생 카롤린 뮈라를 그린 ‘오달리스크’를 발표했는데 다소 기형적으로 길게 늘어트린 허리 때문에 당시 사람들로부터 악평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가장 이상적인 여인의 모습을 표현하기위해 보티첼리가 비너스의 어깨를 비정상적으로 늘어트린 것과 같이 묘사하였다. 신고전주의 화가들은 인체의 이상적 표현을 위한 방법에 있어서도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었다.

19세기 초 혁명의 실패로 인한 민중의 좌절감은 문학과 예술로 나타나는데 이를 낭만주의라 부른다. 낭만주의 미술은 인간 내면의 감성을 표현한 개인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현실을 떠나 개인의 감정을 화폭에 담아낸 작품들을 말한다.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가인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는 그림을 통해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무차별한 폭력을 고발하고자 하였으며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와(Eugene Delacroix)의 대표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1830년 7월 혁명을 그려낸 작품으로 부르봉 왕조를 무너트리고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를 추대하여 새로운 왕정을 수립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그림이다.

들라크루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와는 1830년 혁명에 참여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시대가 바뀌고 화풍이 변하여도 회화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믿음에 대해 들라크루와를 비롯한 낭문주의 화가들은 그림을 통해 보여주었다. 한편 들라크루와는 사진 애호가로도 유명하다. 사진 발명 후 그는 드로잉을 위한 용도로 사진을 즐겨 사용했으며, 심지어 사진협회 회원이기도하였다.

19세기 낭만주의와 함께 도래한 사실주의 화풍은 사진의 발명이라는 거대한 폭풍에 맞서면서 19세기 미술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회화는 사진이라는 정적을 맞아 일보 후퇴하게 되지만, 숙고의 시간의 통해 보다 완숙한 미술사조의 탄생을 예고한다.

신현국 기자 nsset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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